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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역사 ‘군함도’ - 첫번째

알고싶어 2021. 7. 13.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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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구 다카시마 정)에 소속되어 있는 섬이다.

군함도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나가사키 반도 옆의,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 밑에 조그마한 섬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나카노시마(中ノ島) 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하시마(端島) 이다.생긴 것 때문에 군함도(軍艦島, 군함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며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떠나서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옥의 섬’으로 불렸던 군함도. 일본어로 ’하시마(端島)'라고 불리는 이 섬은 섬의 모양이 군용 함선을 닮아 군함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속있으며 일본 최초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선 인공 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섬은 우리 민족에게 가슴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의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1938년 일제 강점기 조선 농촌에서는 ‘지역할당 모집형 강제 동원’이 시행되고 있었다. 일본 본토의 기업이 총독부에 인원을 신청하면 조선에서 지역별로 해당 인원을 차출해갔다. 당시 조선은 극심한 가뭄과 일제의 수탈로 많은 농민들의 삶이 고달팠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징용에 불응하면 식량배급을 끊겠다고 일제가 협박해 농민들은 전시 동원 노무자가 되어 일본 각지의 탄광과 군수시설로 배치되었다.

과거 군함도 모습

그중 한 곳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소유의 군함도 탄광이었다.당시 군함도는 축구장 2배 정도 크기의 섬에 5천명 이상이 거주할 정도의 규모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탄광은 해저 1000m의 깊이의 갱도, 그리고 평균 45° 각도의 경사 때문에 작업하기 무척 힘든 공간이었고, 이뿐만 아니라 해저 밑에 내려갈수록 메탄가스로 인한 폭발로 바닷물의 유입도 잦고, 천장이 무너지는 등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작업복도 없이 팬티 한 장만 걸치고 8시간씩 2교대로 갱도의 끝인 막장에서 일을 했스며, 이 조선인들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갱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고, 심지어 밥도 먹지 못했다.

또 밥또한 콩기름 찌꺼기를 삶은 대두박뿐이라 영양분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작업 중에 쥐가 자주 났고, 몸이 허약해져 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일을 하지 못할 경우 채찍으로 맞아 살 속까지 상처가 났다. 하지만 정작 일을 해서 손에 쥔 돈은 한푼도 없었고, 50엔의 월급을 주겠다는 처음 조건과 달리 식사, 숙소비, 세금, 작업도구 대여비 등으로 돈을 모두 착취당했던 것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탓에 많은 조선인들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바다에서 익사하거나 다시 잡혀 다른 조선인들이 보는 곳에서 거의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했다.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였던 최장섭(89) 할아버지는 갱도가 좁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어린 조선인들이 주로 징용되었고,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당시 하시마 강제 징용된 조선인 피해자는 약 800명 정도이다. 또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조선인은 공식집계로만 134명이고, 실제로 누락·은폐된 사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군함도의 비극적인 역사는 최근에 들어서야 예능프로그램과 영화를 통해 알려져 이슈가 되고 있다. 군함도,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다!! 그 안에는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군함도 내부 콘크리트 건물

더 자세히 알아보면..
하시마섬은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 해상 약 17.5킬로미터의 위치한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되었다. 1921년에는 당시 미츠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서 건조중이던 일본해군의 전함 「토사」를 닮았다 하여 「군함섬(군칸지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쇼와 초기 하시마섬 戰時 중에 미군 잠수함이 진짜 군함과 착각 하고 어뢰를 발사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지만, 실제는 미 잠수함 「티란테」가 석탄 운반선 「백수환」을 노려 격침한 것(1945년 6월 11일)이 와전된 것이다.

당시 하시마 도탄광은 양질인 강점탄이 생산되어, 인접하는 타카시마 탄광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지지해 온 탄광의 하나였다. 석탄 출탄량이 최성기를 맞이한 1941년(쇼와 16년)에는 약 41만 톤을 출탄했다. 인구가 최성기를 맞이한 1960년(쇼와 35년)에는 5,267명의 인구가 있어 인구밀도는 83,600명/km2 으로 세계 최고였으며, 도쿄 특별구의 9배 이상에 이르렀다. 1960년 이후, 주요 에너지가 석유로 변함에 따라 쇠퇴하며, 1970년대 이후의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쇼와 49년) 1월 15일에 폐산했다. 인구는 폐산시에 약 2,000명까지 줄었으며, 그 해 4월 20일, 남아있던 주민이 모두섬을 떠나면서 하시마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일본 강점기 강제 노역 현장이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에 있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의 침식이 진행되고 있다고 교도통신이 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출처: 중앙일보] ‘군함도 강제징용' 또 얼버무린 日…외교부 "어두운 역사 언급 없어 유감"

하시마섬은 근대화 유산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폐허 붐의 일환으로서도 자주 화제에 오르고 있으며,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외벽의 붕괴 개소에 대해서 일부 콘크리트로 수복을 하고 있다.

하시마섬은 미스비시 메트리얼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2001년(헤세이 13년), 타카시마쵸(당시 )에 무상 양도하여, 현재는 나가사키시의 소유이다. 건물의 노후화, 폐허화이기 때문에 위험이 많아, 시마우치에의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되고 있었다. 2005년(헤세이 17년) 8월 23일, 보도 관계자 한정으로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고 황폐가 진행되는 시마우치 각처의 모습이 각 미디어로 소개되었고, 2009년(헤세이 21년) 4월 22일부터 섬의 남부에 정비된 견학 통로에 한정해, 관광객이 상륙·견학할 수 있게 되었다(견학 시설 이외는 시마우치 전역이 출입 금지).

2006년 8월, 경제산업성은 하시마섬을 포함한 메이지시기의 산업시설을 지역의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세계 유산 등록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9월에 「큐슈·야마구치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의 일부로서 세계 유산 잠정 리스트에 추가 기재되었고, 2009년(헤세이 21년) 1월에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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