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궁금

코드피스? 왜 민망하기까지....

알고싶어 2021. 9. 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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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피스는 무엇인가?

 

15~16세기의 남자 바지 앞의 샅주머니, 고간(股間) 주머니. 15세기 호즈의 바대로 부착되었던 천. 호즈는 좌우가 따로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밑위는 앞뒤에 바대천이 필요했었다. 16세기 트렁크 호즈가 달린 물건으로 되어 코드피스도 똑같이 장식으로 강조되었으며, 이 시기의 남성용 하의의 특징으로 되었고 큰 것은 주머니의 역할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드피스 [codpiece] (패션전문자료사전, 1997. 8. 25., 패션전문자료편찬위원회)


중세 시대 유럽에서 남자들이 레깅스 같은 바지를 입은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그때는 지퍼가 발명되지 않아서 끈이나 단추로 고정했는데 그렇게 입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해서 처음엔 남자 성기의 보호를 목적으로 솜을 넣어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점차 견고해지고 커졌다. 갑옷까지도 코드피스가 있게 될 정도였으니. 여하튼 14세기부터 등장한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시의 대상이 되어 점점 크기가 커지고 수를 놓거나 보석을 붙이는 등의 장식이 추가되기 시작한다. 또 일종의 주머니의 기능도 수행하게 되어 열쇠나 보석, 심지어 음식까지 넣어두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패션은 너무 보여주기 그래서 아무리 고증에 미친 드라마,영화 제작자라 할지라도 고증하지 않는다. 확실히 등장인물이 툭 튀어나온 성기주머니를 달고다니거나 혹은 그 성기주머니에서 음식을 꺼내 먹는 장면이 나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코드피스는 당대 여러 남성 초상화에서 그려지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헨리 8세의 초상화(위)



흔히 '서양 복식사' 하면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로코코풍 '공주옷'을 입은 퐁파두르나 보석을 잔뜩 단 독특한 파딩게일과 부채같이 퍼진 러프 칼라를 붙인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떠올릴 만큼 아무래도 눈길을 더 끌 수밖에 없는 화려한 여성들의 복식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남성 복식 역시 여성들의 드레스 만큼은 아닐지라도 시대를 거치며 다양하게 변화했고, 그중에는 따분하리만큼 수수한 것도, 때로는 노골적으로 관능적인 것도 종종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눈에 띄게 복식의 변화가 두드러졌던 르네상스 시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늘의 주인공 코드피스(codpiece) 또한 한 때 이 행렬에 합류했던 서양 남성들의 독특한 패션 아이콘 중의 하나였다.
 
  
 
 코드피스의 등장은 바지의 발전에서부터 비롯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각종 미술품이나 사극,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럽의 중심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에서 바지는 일반적인 것도, 그다지 선호되는 의상도 아니었다. 방한의 목적에서 생겨난 다리싸개의 발전형인 바지가 비로소 유럽 남성들의 다리를 가리게 된 것은 유럽의 패권이 보다 추운 알프스 이북으로 서서히 옮겨가면서부터였다. 중세시대에서야 게르만 풍의 바지가 서양 전반에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의 극단적인 확장으로 맨살의 다리를 내보이는 것이 추잡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비로소 바지의 혁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 초기에 이르면 호즈(hose), 그중에서도 어퍼 호즈(upper-hose)가 등장해 큰 인기를 얻었다. 국가마다 다양한 이름을 가졌지만 일반적으로 트렁크 호즈(trunk hose)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어퍼 호즈는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빵바지' 였다. 서양 쪽 왕자를 약간 우스꽝스럽게 그릴 때 같은 때에 흔히 그 왕자의 바지로 채택되는(?) 허벅지만 둥그렇게 부푼 약간 우스꽝스러운 형태의 바지가 바로 그것이다. 코드피스는 바로 이 트렁크 호즈를 입을 때 남성의 중대한(!) 가운데 부분을 감싸는 음낭 주머니였다.    
 
  처음에는 그저 터진 곳을 가리는 주머니로 시작한 코드피스였으나 워낙 가리는 부분이 부분이다 보니 코드피스에 대한 남성들의(그리고 혹은 여성들의?)관심은 나날이 높아졌다. 불룩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그 부분의 특성상 코드피스의 크기가 곧 그 남성의 성기 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남자의 갑빠를 자극하는 이 조그만 천쪼가리에 호승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성기 크기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노고(?)는 21세기의 남자들이나 중세 시대의 남자들이나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신의 은총을 받아 하늘이 점지해 주신 자연적인 크기 그대로를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행운의 사나이(!)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중세의 유럽 남성들은 사우나나 공중 화장실에서 여지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현대의 남성들에 비하면 약간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대부분 코드피스 안에 약간의 이물질을 집어 넣어 흡족할 만한 크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벗겨 보기 전에는 아무도 저게 정말 저 인간의 진짜 크기인지 대충 솜을 쑤셔박은 공갈크기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속타는 심정으로 흘끔흘끔 바라보며 대략의 크기를 가늠해 보며 자기도 따라할 밖에 없었다.
 
  비교적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솔직했던 독일계와 섬나라 잉글랜드에서 특히 코드피스의 크기는 열광(?)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그 크기에 있어서 등에 깃대 꽂고 앞장 섰던 인물이 바로 헨리 8세(Henry Ⅷ)였다. 젊어서는 외국 대사들이 모두 경탄의 보고서를 자국에 올릴 만큼 준수하고 스포츠에 능한 스타 같은 왕으로, 나이가 들어서는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흔든 몇 안되는 잉글랜드 왕으로 군림한 헨리는 기사도 정신에 심취하고 불혹의 나이에 몽정을 한 것을 자랑할 만큼 평생 남성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남성성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거대한 코드피스를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그 우람한 코드피스 속의 '거시기'와 여섯 아내를 데리고 1509년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고 캐서린 파와의 마지막 결혼에서 1547년 사망할 때까지 그 오랜 기간 동안 아들을 낳으리라 그렇게 난리를 치며 얻은 성과(아들 하나 딸 둘)가 워낙 형편 없었던 탓에 대사들과 신하들은 가린 손 뒤로 은근히 왕을 비웃었다. "대체 저건 어디다 쓰려고 있는 건가?"    
 
 헨리 8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유럽의 왕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프랑스 왕 앙리 2세(Henry Ⅱ)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大)합스부르크 제국을 건설한 황제 카를 5세(Karl Ⅴ)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큰 코드피스를 자랑했다. 오히려 그나마 색깔을 같게 통일한 헨리 8세보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조끼에 전혀 다른 색깔의 코드피스가 툭 튀어나오게 한 것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헨리 8세는 약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코드피스의 영광도 길지는 않았다. 앙리 2세의 아들이었던 프랑스 왕 샤를 9세(Charles Ⅸ)의 초상화를 보면 이것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빵'의 크기가 전 세대의 바지들보다도 좀 더 커져 우스꽝스러운 면모는 더해졌지만 코드피스의 크기는 훨씬 작아졌을 뿐 아니라 살짝 가려져 더 이상 대놓고 내놓는 대상에서도 빠졌음을 짐작케 한다(게다가 당대 패션을 선도하는 국가들이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무식하게 크기만 한 코드피스'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시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바지의 형태가 더욱 발전해 랭그라브(rhingrave), 퀼로트(culotte), 판탈롱(pantaloon) 등이 등장하면서 코드피스는 점차 작아지다가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쯤되면 패션에 대한 관심이 코드피스보다는 남녀를 불문하고 칼라에 훨씬 집중되어 흔히 '쟁반 위에 얹어진 세례자 요한의 목 같은' 과 같이 표현되는 빳빳하고 거대한 칼라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게 된다.   
 
 
 

샤를 9세. 아직 불룩한 형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거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전대의 왕들보다 크기도 훨씬 작은 모습이다.   


 
 

앙리 4세(Henry Ⅳ). 발루아 왕가의 샤를 9세와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부르봉 왕가를 이룩하는 그의 시대가 되면 코드피스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다.반면 칼라의 크기는 목을 살짝 감싸는 수준에 불과한 선대 왕들보다 훨씬 거대하다. (물론 이 초상화보다 훨씬 더 거대한 칼라를 달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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